
김종길 | 미술평론가
그렇다면 중력에 역행하는 모빌의 미학은 무엇일까? 가장 큰 차이는 중력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김종길 | 미술평론가
역모빌의 구조
오유경의 움직이는 오브제 모빌(mobile)은 1932년에 H.칼더가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아 삼원색의 원반을 철사에 ‘매달아’ 설치한 것과는 구조적으로는 같으나 그 위치가 다르다. 칼더는 천장에 매달았고 오유경은 대지에 매달았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매달아서 움직이도록 한 모빌의 구조와 달리 그들이 사유하는 모빌의 미학적 의미는 그래서 완전히 다르다. 가장 먼저 주목할 점은 칼더의 모빌이 중력에 순응하면서 미적 형식을 완성한 것에 반해 오유경의 모빌은 중력에 역행하면서 좀 더 자유로운 미적 형식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력에 순응하는 모빌은 지구 중심이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움직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힘에 영향을 받는 무거운 재질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칼더는 바람을 이용하거나 관객의 참여를 의도해서 모빌을 움직이도록 하는 가벼운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중력은 그의 작품에서 하나의 사상처럼 작동하는 미학적 원리였다. 모빌과 지구 중심이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없다면 그 미학적 구조는 쉽게 해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사유의 지도처럼 하나의 선에서 다른 하나가 이어지고 그것이 미적 형태의 어떤 균형(symmetry)을 이루면서 조형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런 ‘힘의 미학’이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력에 역행하는 모빌의 미학은 무엇일까? 가장 큰 차이는 중력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오유경은 은박풍선에 헬륨가스를 넣어 ‘당기는 힘’을 무화시킨 뒤, 그것들이 둥둥 뜬 상태에서 어떤 미적 상태의 위치를 갖도록 유도할 뿐이다. 구속력이나 인장력이 없는 오브제 모빌들은 작가가 위치시킨 지점에서 자유롭게 떠다닌다. 모빌의 위치를 잡는 수평 막대기(PC튜브)와 풍선을 잡고 있는 투명한 선이 지구와 그것들의 유일한 원심력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모빌의 균형은 작가가 만들어 낸 바로 그 원심력의 ‘미적 의지’에서 최대한의 조형적 풍경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중앙홀 유리돔에 설치한 그의 역모빌 작품들은 무중력의 해방과 탈주의 의지가 긴장선을 타면서 고요하고 느린 리듬을 만들어 냈다. 아주 미세한 공기에도 반응할 수밖에 없는 헬륨 풍선들이었기에 사람이 들고나는 그 순간의 공기 흐름을 타고 출렁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강물처럼 혹은 파도처럼, 바람의 결을 타고 미끄러지는 우주 배와 다르지 않다. 상징으로서의 우주 배는 행성(planet)이다. 그러니까 유리돔을 태양계와 비슷한, 큰 은하계의 작은 항성계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풍선들은 크고 작은 행성이 된다. 투명한 천장을 가진 유리돔 속의 항성계와 행성들. 그런데 그것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동일한 풍경을 갖되 중력에 속한 작품들이라면 그런 상상은 그저 인상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유경의 작품들은 달아나려는 힘과 당기는 힘의 원심력이 균형을 이루면서 지구와 함께 태양을 돌고 있으니, 미학적으로는 ‘미의 행성들’이라고 불러도 괜찮으리라.
흙으로부터-진앙(Epicenter), 대지의 스펙트럼
오유경이 돔하우스 중앙 홀에서 ‘흙’을 주제로 사유한 것은 두 개가 아닐까 한다. 하나는 우리 모두는 둥근 땅(地球)에 발 딛고 서 있다는 것. 두 번째는 그 땅의 중심과 표면이 어디서든 직선을 이루어야 ‘서 있음’과 ‘둥글다’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 그는 “흙으로부터-진앙”을 구체화하기 위해 진앙이 가진 “진원과 지심(地心)을 맺는 직선이 지구의 표면과 교차하는 지점”이라는 뜻을 그가 사유한 것과 뒤섞었다. 진앙은 지진의 진원을 이야기할 때 호명되는 말이지만 그는 진앙을 ‘지구의 중심(地心)’으로부터 확장된 선으로 이해함으로써 헬륨 풍선들이 그 선을 타고 탈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냈다. 풍선들은 그러니까 땅[흙/대지/지구]의 중심이 진앙과 교차하는 선의 바깥에서 그것들이 흔들리는 만큼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거울’이 된 것이다.
관객은 중앙 홀에 서서 은박 풍선들이 비추는 대지의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높낮이와 크기가 조금씩 다른 풍선들은 둥근 거울이 되어서 중앙 홀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이 선 위치에서 이쪽과 저쪽의 풍선들은 시선의 각도에 따라 되비추는 풍경이 다르다. 그리고 그것들이 흔들릴 때에는 담아내고 되비추는 스펙트럼이 다양해진다. 게다가 물질로서의 풍선이 남기는 그림자와 은박이 반사하는 빛은 해가 뜨고 지는 하늘의 이치에 따라서 변화무쌍하다.
중앙 홀의 바닥에는 세 개의 큰 원이 있다. 첫 번째는 가장 큰 원을 이루는 벽이다. 그 벽과 홀의 중심 사이에 두 개의 원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중심원의 테두리에서 사방(四方)을 이루는 네 개의 선이 벽까지 그어져 있다. 미술관은 이 유리 돔이 전시관 중심부의 공간으로 “관람자와의 소통을 돕는 열린 공간”이라면서 “클레이아크의 정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곳이라고 밝히고는 있으나, 그 원과 선의 조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그 원과 선의 구조에서 하나의 추론을 더해 본다. 그 원이 미술관이 말하는 ‘소통의 열린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사방팔방(四方八方:모든 방면)의 사통팔달(四通八達:길이 사방팔방으로 통해 있음. 막힘없이 통함)의 구조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원의 중심은 그 모든 길로 열린 제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오유경은 그 제로 포인트에 큰 돌 하나를 두고 그 돌에서 이어지는 하늘 선을 생각해 냈다. 그렇다면 그 돌이 곧 진앙이다. 그리고 그 돌의 진앙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선은 사통팔달의 수평적 구조에 더해지는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위아래 수직선이다. 사방팔방의 수평과 십방의 수직이 만나야 ‘통’(通)이 된다. 두루두루 무수한 세계, 열린 세계는 바로 거기 대지로부터의 진앙이 뚫려서 열린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유경의 모빌들은 대지의 풍경을 담고 전(全) 시공간 속에 편재하는 우물이요, 빛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면의 거울이 아니라 깊이를 가진 우물이라는 이야기.
하나에서 여럿으로,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우물의 표면은 거울이다. 그것은 고요할 때 완전한 평면의 거울이 되고 요동칠 때 일그러진 거울이 된다. 우물 밖의 모든 것들은 흐르면서 우물면에 어리지만 그 내부 깊은 곳에서 올라와 어리기도 한다. 오유경의 둥근 거울은 오브제 모빌로서 풍선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의 상징은 ‘빛거울’의 우물이다. 빛을 반사하면서 동시에 풍경을 담으니 ‘빛거울’요, 또한 전(全) 시공간으로 열려서 풍경을 편재시키니 ‘우물’인 것이다. 그는 빛거울의 현실계와 우물의 상징계를 이미 그 이전의 작품들에서도 실험한 바 있다. 그런데 이때 그의 작품에서 좀 더 주목해야 할 개념이 하나 있는 듯이 보인다. “전 시공간 속에 편재하는 우물”, “전(全) 시공간으로 열려서 풍경을 편재시키니”라는 문장들에 등장하는 ‘편재’가 그것이다.
‘편재’(omnipresence)라는 말은 본래 종교적 개념이다. 사전에서는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 곧 그분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한 표현으로서, 하나님은 모든 공간을 초월하시며 동시에 그의 전존재(全存在)로서 공간의 모든 지점에 존재하심을 이르는 말(시139:7; 렘23:24; 롬10:6-7). 일명 ‘무소부재’(無所不在), 하나님의 ‘무변성’(無邊性)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전 창조세계 속에 내재하시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조금도 구속되지는 않으신다(왕상8:27; 사66:1; 행7:48-49; 17:27-28).”[『교회용어사전』, 생명의 말씀사, 2013.]고 밝히고 있다. 오유경의 작품이 종교성을 지향하는 기념 조각이 아닌 이상 사전의 의미에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무한성, 완전성, 초월과 전존재, 무소부재(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음), 무변성(광대 무한함) 등이다. 어디에나 있고, 어느 장소에도 제한되지 않으며, 모든 공간을 꿰뚫어 온전히 채우는 편재의 무변성.
돔하우스에 설치된 오유경의 우물 풍선들은 몇 개에 불과하지만 상징 기표로 해석할 때 그것은 수 천 수만의 무한성으로 확장될 수 있다. 더군다나 풍선과 풍선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효과는 완전한 무소부재의 카오스적 상황을 초래한다. 2015년의 <Entanglement>이 우물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얽히고설킨 상징으로서의 ‘거울-홀’을 보여주는 빛들의 관계였다면, 2013년의 <Moon's pagoda>는 세계가 쌓아 올린 깊은 탑의 빛그림자와 달거울의 우물을 상징화 했다. 우물은 땅의 샘물이면서 동시에 신화가 샘솟는 신성한 블랙홀이자 화이트홀이다. 『삼국유사』에서 우물은 시조신화가 탄생하는 가장 성스러운 자궁이다. 오유경의 작품들도 ‘거울’이 가진 ‘빛’과 ‘반사경’의 물리적 구조를 초월할 때 카오스모스의 우주를 엿보인다.
모든 것은 어떤 하나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그의 작품들도 진앙의 제로포인트에 놓인 돌 하나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 돌의 존재는 우물 풍선들에 편재되면서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특이점의 초월적 상징이 되었다. 돔하우스는 역모빌의 헬륨 풍선들이 설치되어 있는 동안 시방세계의 블랙홀이자 화이트홀이었을 것이다. 유리돔을 형성하고 있는 삼각, 육각의 그물망이 우주의 인드라망이요, 거대한 은하계이듯이 그 안에서 행성들은 3차원과 4차원, 아니 5차원의 우물 거울을 비추고 편재시키기 때문이다.